장마

전력 2016. 7. 9. 23:25


며칠 째 창에는 물방울이 부딪치고 있다. 그리운 사람의 생각으로 가라앉기 좋은 날이다. 추억이나 씁쓸한 마음에 잠기어 낱말들을 곱씹기 좋아하는 사람이 아니지만, 스키퍼는 아주 오래전의 편지를 꺼내놓았다. 종이는 습기를 먹어 그의 손에서 조금 자국이 남는다. 그 글씨들도 축축한 공기 속에 번져가는 것 같다. 잉크 냄새를 삼킨 그의 목에서 거친 숨이 한번 울렁였다. 아주 가끔씩만 마주하기로 한 얘기들이 다시 스키퍼의 가슴에 자리 잡았다. 편지의 주인은 땅이 젖는 날이면 유난히 그가 보고 싶다고 했다. 그것이 허튼 소리라며 혀를 차도 정말로 맘이 무른 한심함이라 넘기기엔 아까운 말이란 생각이 들었다. 이 말들을 읽어내려 가자면 그 또한 쉽사리 여린 마음을 적어낼 것 같아 속이 쓰렸다


스키퍼는 한 번도 답장을 보낸 적이 없었다. 그래도 하얗고 작은 봉투는 언제나 장마를 맞이하기 바로 전에 날라 오곤 했다. 비가 내리는 날마다 편지를 읽어야 했던 이유라 조금 괘씸함이 느껴졌다. 아주 가끔 기다려보기도 하는 종이가 도착하더라도 비는 그에게서 반가운 물기가 아니었다. 그럼에도 그가 순순히 책상 맡에 앉아 집중하는 눈을 깜빡이는 건 애틋한 마음을 품을 구석이 남아있기 때문이다


올해의 편지에는 작은 꽃송이가 담겨져 있었다. 마른 안개꽃이었다. 그때의 그 꽃에는 어째선지 장미 향기가 나는 것 같았다. 스키퍼는 아주 오래전에 지나가는 말로 들었던 것을 생각해냈다. 술에 노곤히 취한 부관은 장미가 몹시 사랑스럽고 또 그가 좋아하는 꽃이라고 했다. 그 말에 참 별스런 취향을 다 보겠다고 퉁명스럽게 굴자 그는 그 말에 동의하는 듯 알딸딸한 머리를 끄덕였다. 그래도 붉은 색의 장미가 참 예뻤다는 말을 반복했었다


스키퍼는 비 냄새가 나는 안개꽃에 어쩐지 마음이 시큰했다. 꽃을 받길 기대한다면 장미꽃이겠거니 하는 마음이 남사스럽고 부끄러워지기도 했다웃기는 일이었다. 비가 쏟아지는 날 꽃을 받는다는 것도, 자신이 꽃을 받을지 모른단 맘을 가진 것도 우스워 입술을 꽉 물었다. 고개를 젖혔다. 빗방울이 부서진다. 스키퍼는 둘 사이에서의 왠지 모를 젖은 기운이 늘 불안했었다. 그리고 그 불안감은 결국 무겁고 습한 아쉬움과 기억이 되어 생각 속에 물기를 머금었다. 늦은 일이라는 건 당연했다. 모르지 않았지만 또 너무 성급한 얘기였다. 그치만, 그래도


이 장마는 누군가를 보고 싶어 하기 아주 딱 좋았고 손에 들린 편지와 작은 꽃은 그의 눈시울을 적실만한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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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총과 이어지는 이야기

장미랑도 조금 이어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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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판다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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