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을 쿵쾅쿵쾅 거세게 굴리고 훽 뻗은 팔은 며칠 전 들고 나왔던 커다란 수트케이스를 챙겼다. 스키퍼는 그의 인상이 잔뜩 구겨진 만큼 짐들을 구겨 넣었다. 눈앞에 더 이상 천하의 원수를 두지 않겠단 의지가 강해 보였다. 어쩐지, 어쩐지…! 스키퍼는 속으로 불편한 생각을 곱씹으며 이를 세게 맞물렸다. 씩씩 거리는 숨만 내쉬는 그를 진정시키려 따라온 부관의 안절부절 하는 마음을 모르는 척 떠날 작정인 것 같았다. 코왈스키가 대장의 앞에서 반쯤은 빌며 잔뜩 성이 난 군인을 설득하고자 했다. 이 요란한 상황에도 잠이 깨지 못한 막내는 상황을 이해해보려 고개를 갸웃거렸다. 아직 아침이 차려진 식탁 앞을 떠나지 않은 채였다.
“제발요, 대장님. 저희 지금 나가면 갈 곳이 없습니다. 아직 배는 뜨지도 못하고요, 열차는 사람 폭탄이 터졌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그럼 자네들은 여기 있던가, 난 어디 골목이나 가서 자빠져 있으면 되겠지!”
그는 들으라는 듯 고개를 빼고 크게 소리쳤다. 덕분에 뒤에 선 집주인이 못마땅한 표정으로 성급하게 짐을 꾸리는 스키퍼를 바라본다. 하지만 그의 본 직업에 영향을 받는지라 그 불만스러운 표정은 너무나도 끔찍하게 어둡고 험악했다. 그의 오랜 맞수가 골목으로 뛰쳐나가 자빠진단 것이 싫었는지, 영문도 모르는 이유로 갑작스레 화를 내며 짐을 싸고 있는 것이 불쾌했는지 그 얼굴로는 구분할 수 없었다.
늦여름의 휴가를 나왔던 특공대가 사이코 같은 악당에게 신세를 지게 된 것은 이틀 전의 일이었다. 작은 요트를 구해 허드슨 강으로 나설 때까지만 해도 날은 참 맑았다. 그날 하늘의 변덕은 과학자가 미리 예상할 마음조차 들지 않을 만큼 갑작스러운 것이었다. 말도 안 되는 빗속에서 떠올린 영화 대사가 돛을 내려라 인지, 올려라 였든지, 헷갈리고만 대장에 의해 그들은 폭풍 속을 헤매다 결국 호보컨에서 발이 묶여 버렸다. 그의 대장이 선장이 아닌 해병으로 적성을 선택하기 알맞았다고 코왈스키는 생각했었다.
결국 대장은 책임을 지고 이곳에서 가장 잘 아는 사람의 집 문을 두드릴 수밖에 없었다. 물론 그 얼굴은 무척이나 꺼려했지만 막내가 모포에 돌돌 말린 채 재채기를 쉴 새 없이 하고 있었다. 막내뿐만 아니라 모두 비에 홀딱 젖은 지친 생쥐였다. 놀랍게도 한스는 기꺼이 그 생쥐 꼴들을 머물게 해주었다. 젖어서 살갗에 달라붙은 대장의 얇은 셔츠가 한몫을 한 것 같기도 했다. 폭풍이 잠잠해지고 강이 불어나지 않게 되어 맨해튼으로 돌아갈 수 있을 때까지 한스의 익숙지 않은 친절함에 잠시 몸을 녹일 생각이었다. 대장은 원수의 눈길과 허리를 감싸는 손을 뿌리치고 어서 씻길 원했다. 그를 위해 한스가 문고리를 열어준 욕실에는 컵 하나에 보라색과 파란색 칫솔 두 개가 꽂혀 있었다. 이상한 기분에 그의 눈살이 살짝 찌푸려졌다.
샤워를 마친 스키퍼는 수건을 챙기려 벽장문을 열었다. 그러다 무언가를 발견한 그의 눈길이 두 번째 칸에서 멈춘다. 혼자 사는 남자의 집에 있을 만한 것이 아니었다. 뚝뚝 떨어지는 물방울들을 잊을 만큼 그는 당혹스럽고 낙담한 낯빛을 거둘 수 없었다. 시선이 다시 두 개의 칫솔에 가 떨어지지 않는다. 분명 평소 누군가가 이곳에서 한스와 함께 한 것이다. 그것도 여자가. 그날 스키퍼는 어쩐지 밤잠을 이룰 수 없었다.
두 번째의 아침을 악당의 보금자리에서 맞이한 특공대는 그 전날과 같이 집주인을 위해 얌전히 식사를 준비하고 있었다. 일찍이 리코가 가까운 식료품점에서 장을 보아오고 대장은 그 기특함에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그러자 한스가 사랑하는 사람을 위한 요리는 오늘도 할 수 없겠다며 앞치마를 리코에게 건넸었다. 그 말을 들은 스키퍼의 표정이 썩 좋지 않았다. 리코가 솜씨를 발휘한 아침이 차려지고 미열이 있는 막내를 깨워 수프 앞에 앉혀 두었다. 한스는 아침을 거룰 생각인 것 같았다. 스키퍼가 콩이 들어간 수프와 연어 크레페를 거절하는 그를 보며 콧방귀를 뀌어댔다. 아주 어린애의 입맛이 따로 없다고 빈정거리는 말 또한 서슴지 않는다. 스키퍼의 심통은 신세 지는 사람의 태도라고 보기에 어려웠다.
그가 아침을 만들어 주어 고맙다는 듯이 리코의 등을 한 번 더 다독거리자 한스는 흠 하는 입모양을 하고서 팔짱을 했다. 저 리코라는 덩치 큰 흉견 같은 놈이 계속 눈에 밟혔다. 스키퍼와 함께 하며 그에게서 많은 격려를 받는 것 같은 그는 항상 그의 대장의 뒤를 따라다녔다. 그리고 잦은 스킨십과 함께. 한스의 얼굴이 정적으로 변했다. 이곳에 있게 된 지난날부터 스키퍼는 계속 퉁명스럽게 굴었었다. 적과 한 지붕 아래 지낸다는 것이 그의 사전에 없는 경우라 그런가 싶다가도, 새침하게 눈을 흘기는 것이 상당히 귀엽…, 이게 아니라. 괜히 비죽이는 입을 하는 건 무언가 다른 이유가 있을 법 하기에 곰곰이 고민을 해보아야 했다. 아니면 정말로 그는 이곳에 있다는 사실이 매 순간 싫은 걸지도 몰랐다. 한스가 식사를 끝낸 스키퍼에게 냅킨을 건넸다. 그가 웃으며 달링을 위한 거란 얘길 하자 사단은 일어났다. 스키퍼는 그 자리에서 따로 주인이 있는 줄 몰랐던 냅킨을 집어던졌다.
“대장님, 부디 조금만 참아 주세요. 네?”
그리고 다시 돌아와, 코왈스키는 아직까지 그의 대장을 말리지 못하고 있었다. 리코는 옆에서 대장을 거들고 있었고 부관은 이제 거의 울고 싶어졌다. 한스가 짐을 싸는 데에 열을 내는 스키퍼를 보며 중얼거렸다. 그래, 나갈 거라면 대신 정어리 인형은 내가 준 거니 두고 가라고. 대원들도 모르는 인형 얘기에 스키퍼가 눈을 크게 뜨고 펄쩍 화를 내며 돌아섰다.
“뭐, 뭐…! 이런 천하의 사기꾼 같으니. 받으라고 줬으면서!”
“내놓게!”
“싫네! 존이라고 이름까지 붙여줬다고!”
스키퍼는 원수의 치사함에 살이 떨렸다. 분명 선물이라고 줬던 것을 이제 와 다시 가져간다니! 맛있어 보이는 모양새나 악몽을 꿀 때 안고 잠들기 좋은 것이라 마음에 들었던 인형이었다. 굳이 누가 주었기 때문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대원들은 기울어진 고개와 함께 서로 어깨를 까딱거렸다. 스키퍼의 얼굴이 여러모로 붉게 변했다. 한스는 마저 그가 주었던 것들에 대해 돌려받길 요구했다.
“내가 사준 정어리 통조림이라도 주고 가던가!”
“자네가 준 건 꽁치 통조림이었어!”
“어제 먹은 데니쉬라도 뱉어!”
“그놈의 빵은 자네 화장실 변기에서 찾아보게!”
“자네는 왜 그렇게 이 집에 있길 싫어하는 거야…!”
한스가 울컥하는 목소리로 소리쳤다. 그 말들에 경직된 스키퍼는 꽉 다물어버린 입매를 옴쌀 거렸다. 곧 마찬가지로 격양된 말들이 스키퍼의 입에서 쏟아져 나왔다.
“애인씩이나 있는 사람의 집에 더 있고 싶지 않으니까!”
“뭐? 애인이라고?”
“그래!”
“무슨 소릴 하는 거야 스키퍼, 애인이라니…….”
“그야 자네 화장실 벽장 안에…!”
“오, 오 스키퍼…….”
그의 눈이 이상한 이야기라도 들은 듯 동그래졌다. 스키퍼는 그 앞에서 상기되어 붉어진 얼굴로 입을 떼었다. 그제야 오해가 있었단 걸 알았는지 한스가 한숨과 함께 얼굴을 쓸어내렸다. 안도감이 가득한 표정이었다. 그는 목을 가다듬더니 조금 머쓱해하며 벽장 속 물건에 대해 얘길 꺼냈다.
“그건 말이야, 내가 그, …일을 하러 간 동안 집을 정리하러 와주는 아가씨가 놓고 간 걸세.”
암요, 그 일이라는 게 우리 대장님을 찾아와 뉴욕을 인질 잡는 것이겠죠. 코왈스키가 속으로 중얼거렸다. 스키퍼는 한스의 말을 이해하고서는 숨이 누그러졌는지 두 눈을 깜빡거렸다. 그리곤 제일 처음 보았던 그 칫솔들을 생각해냈다. 사람이 평소 칫솔을 두 개씩 쓸 일은 없을 테였다.
“그럼 칫솔은? 컵에 꽂힌 칫솔 말이야.”
“그건 자네 것이잖아?”
스키퍼의 물음에 그가 반문한다. 뭔가 잘 못 들었다는 듯 스키퍼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 모습에 한스가 다시 한 번 손바닥으로 얼굴을 감싸 쥔다. 그는 스키퍼가 오래전부터 파란색 칫솔만을 사용했다는 걸 기억하고 있었다.
“내가 꺼내둔 건데, 난 여태 네가 그걸 쓰는 줄 알았다고…….”
그의 귀 끝이 부끄러움으로 확 달아올랐다. 그들은 작정하고 짐을 꾸린 채 나왔을 테니 본인의 세면도구쯤은 가지고 있었을 텐데. 잠깐. 그전에 그렇게 심통을 내던 이유가 결국……. 악당이 깨달은 듯한 표정을 짓자 그 표정 변화를 본 대장은 대원들을 두고 악당의 집에서 바로 달아나버렸다. 남겨진 그들은 그의 뒷모습으로도 창피해하는 얼굴을 짐작할 수 있었다.
스키퍼…! 한스는 도망치는 오래전의 연인을 쫓아 뛰어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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