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력

물총(water pistol)

판다멍 2016. 7. 4. 19:59


그는 나에게 무엇이었을까 잠시 생각해본다. 또 그에겐 나는 뭐였을까. 책상 위에는 말라버린 꽃다발의 풀냄새로 아득하다. 오늘 밤은 비가 내린다. 물기를 안은 꽃은 이제 달콤한 향은커녕 후각을 쏘아붙인다. 이 선물이 이렇게나 형편없는 것이라곤 생각하지 못했다. 하물며 그를 떠올리는 바람에 사둔 것이다. 한 품으로 안아들 때의 화사함에, 나는 기뻤었는데. 장마가 접어들고 말라붙은 풀에서도 벌래들은 활개를 칠 테였다. 아마 그 꼴까지 본다면 나는 비관과 유쾌함을 한 번에 느껴버리고 말리란 생각이 들었다. 그가 생각나는 물건을 버린다는 건 빌어먹게도 싫은 일이다. 나는 작은 꽃 하나만을 여린 줄기와 함께 꺾어두었다. 조금 애틋하고 못나게 바스라지는 꽃들은 구겨진 휴지들과 함께 뒤섞였다. 코끝이 시큰거렸다. 풀 향 때문만은 아니었다.

 

그가 아는지 모르겠다. 나는 장미를 참 좋아했다, 어째선지 그와 닮아있어서. 하지만 욕심을 부리지는 않았다. 내가 꺾어둔 작은 송이는 안개꽃이었다. 그에 관한 일이라면 욕심을 부리지 않을 수 있었다. 아니 사실은 그럴 수 없었지만 할 수 있었다. 그래야만 했으니까. 그에게 내가 무엇이었는지 정말로는 잘 알고 있었다. 엄연한 사실에 나는 그저 희망이라고 속삭이는 내 망상을 치부하고 있었던 것뿐이었다. 그저 아주 작은 순간만이라도. 내 감정에 어울려주는 일이 있다면, 일어날 것이라면, 하고. 그렇담 나는 그가 마음껏 상대를 붙잡고 휘두르기를 원한다면야 기꺼이 그래줄 수 있었다. 그의 가짜 무기 행세를 해도 좋았다. 그런 생각으로 사무칠 때면 눈앞의 모든 것이 억울해 보인다. 너무나도 억울해서 보이는 것들은 일렁이기까지 한다. 그러다 내 뺨으로 쏟아져 내렸다. 그에게 잡힌 나에게서 나오는 건 이 축축함뿐이고,그리고 언제나 속이는 기분이다. 비어버린 포장지는 무슨 의미가 있을까. 선물하지 못하는 꽃은, 이렇게 힘이 드는 내 마음이 그에게 무슨 의미가.

 

시간을 흘러간다. 새벽도 흐른다. 막연하게 잊힐 것이란 착각을 할 때가 있다. 바람이었기도 했다. 그럴 수 없는 이유는 그는 아직도 내 하루 위에 있었다. 참 지독했다. 벌써 얼굴을 본 지도 꽤 되었는데 나는 아직 커피봉투를 집을 때나 잠자리의 베개를 다듬을 때, 불면증으로 고생하던 그를 생각한다. 커피를 심문하던 모습은 심각한 데에 비해 우스웠지만 모자를 태워먹었을 적엔 말이 아니었다. 누군가가 챙겨주지 않으면 쉽게 잠에 들지 못하는 그의 옆엔 이제 누가 있을까. 그는 사실 혼자서 하지 못한 일도 많았는데. 이렇게 땅에 물이 고이는 날엔 나대신 일기예보라도 보며 옛 부관의 생각을 해줄까. 오른편에서 그의 이야기 중 하나가 될 수 있었단 건 지금에도 기분 좋은 사실이었다.그리고 나는 그가 언제나 내 이름을 먼저 불러주는 것에, 그의 명령 중 하나의 낱말은 나라는 것에 유독 자부심을 가지고는 했다. 그는 아주 가끔가다가 나를 자랑스러워했고 나는. 난 그저, 날 말해주는 그가 좋았다.

 

우리는 서로의 삶에서 비교적 일찍 만나게 된 편이, 그러니까 내게는 아직 그를 그릴 시간이 충분하지만 그에게는 내가 모르는 시간들이 있었고 모르는 인연이 있었다. 언제나 그걸 알게 될 때마다 우리의 좁은 관계가 원망스럽기도 했다. 그의 원수라는 남자가 모든 것을 얼려버리는 총을 들고 날뛴다면 그에게는 나라는 피스톨이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 덜 슬펐다. 비록 이것조차 이렇게 슬프다며 그가 싫어하는 방식으로 온몸의 물을 짜낼 가짜 피스톨이지만. 나에게서 나오는 것은 역시 눈물뿐이었다.


그가 보고 싶다. 이건 사과가 아래로 떨어지는 것보다 자연스럽고 또 그만둘 수 없는 그리움이다. 난 언제나 그와 생각을, 그의 생각을 정리하기 위해 책상 위의 등을 켰다. 이렇게 펜대를 잡고, 습기에 취해서. 오늘 밤에도 난 그를 떠나보낼 수 없었다. 장마를 맞은 꺾인 장미에겐 물줄기 따윈 필요가 없었어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