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동스킵프라 이틀 뒤
자그마한 팔이 스키퍼의 목을 끌어안았다. 품에 안긴 꼬마는 눈을 반짝반짝 빛내며 제일 아끼는 펭귄 인형과 고무줄총을 보는 눈빛보다 사랑스럽게 그를 바라보았다. 군인은 그 귀여운 눈동자 앞에서 어느 때보다 상냥한 표정으로 풀어졌고 따뜻하게 미소를 지어준다. 그와 달리, 작은 손님을 위한 우유와 쿠키를 부엌에서 준비해오는 프라이빗의 표정은 그리 좋지 못 했다. 그건 자기 몫의 간식을 양보해야 하기 때문이란 유치한 기분 따위가 아니었다. 프라이빗은 알 수 있었다. 저 쪼끄만 악마의 속에 그의 대장님을 가로채려는 시꺼먼 속셈이 있다는 것을. 게다가 열세 살이나 먹은 남자아이를 꼬마라고 예뻐하는 일은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프라이빗의 부들거리는 손이 컵에 붓던 우유를 흘렸다. 그래도 그는 생긋 웃으며 얄미운 손님의 앞으로 간식거리를 대접한다. 꼬마는 방해꾼의 등장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웃었다.
“전 커서 스키퍼 아저씨랑 결혼할 거예요.”
프라이빗이 내려놓던 우유가 결국 엎어지고야 만다. 쟤는 대체 뭐라는 거야? 그 애교스러웠던 얼굴이 드물게 붉으락푸르락 해졌다. 알동이란 애칭의 아이는 말을 마치고 수줍은 듯 스키퍼의 어깨에 얼굴을 폭 묻었다. 스키퍼가 동그란 눈을 짓다가 그 귀여움에 새어 나오는 미소를 참지 못하고 웃는다. 티슈로 저지른 일을 처리하던 프라이빗이 모른 척 다가와 옆에서 스키퍼를 살며시 포옹했다.
“아이, 대장님. 저도 끼워주세요-.”
하지만 방심한 프라이빗은 미처 알지 못 했다. 5년이란 시간이 흐른 뒤에도 그는 그저 둘 사이에 끼어있는 존재가 되리란 것을! 저 꼬마라 불리는 소년이 다 큰 악마가 되어, 그의 스키퍼를 정말로 눈앞에서 채가려는 날이 온다는 것을!
한가로운 점심이었다. 정찰이 끝난 뒤엔 늘 그렇듯 식사를 마치고 잠깐의 휴식이 있었다. 그리고 어떤 다급한 손님은 벨을 누르지도 않은 채 요란스럽게 기지를 방문한다. 장성한 체구가 스키퍼를 소파 뒤에서 확 안아버리고 어느새 감미로워진 목소리로 장난스럽지만 또 기분 좋게 웃었다.
“헤헤 스키퍼, 저 왔어요.”
“그래, 그래. 우리 알동이 왔구나.”
스키퍼의 그 나긋한 인사를 듣자 배실 거리며 그 어깨에 차가운 뺨을 비볐다. 스키퍼는 어깨를 끌어안은 그의 손을 토닥토닥 두드린다. 그 둘을 멀찍이서 바라보는 프라이빗만이 손톱을 깨물어댔다.
저 훌쩍 커버린 악마는 더 이상 꼬마도 소년도 아니었다. 자신보다 넓은 어깨와 큰 키를 한 주제에 아직도 어리다며 대장에게 사랑받는 꼴이 그에겐 몹시 거슬릴 수밖에 없었다. 밉상 일리 만치 능청스러운 입에선 이젠 아저씨라는 호칭도 나오지 않고, 스키퍼라는 이름을 부르고 있었다. 프라이빗 그조차 한 번도 다정스럽게 불러보지 못한 대장의 이름이 들릴 때마다 울컥울컥 치솟는 마음을 다잡아야 했다. 이틀을 더 보내면 만으로 열여덟의 나이가 되는 악마는 어느새 스키퍼의 옆에 앉아 그가 보는 신문에 참견을 하고 있다. 그 우습고 유쾌한 말들에 스키퍼는 보던 신문을 접어버리고 못 말리겠단 표정으로 알동이를 바라보았다. 그제야 스키퍼와 눈이 마주칠 수 있게 되자 그는 조금 거칠고 주름진 손을 두 손으로 꼭 잡았다. 어렸을 때보다 깊은 애정을 담은 눈빛으로 눈앞의 몇 십 년이나 연상인 상대를 마주한다. 어린 청년은 입을 잠시 움찔거리더니 숨을 골랐다.
“스키퍼, 나랑 결혼해주세요.”
이틀 뒤에는 정식으로 절차를 밟을 수 있어요. 보호자 동의 필요 없는 거 아시잖아요. 그 순간 스키퍼가 어떤 입을 떼기도 전에 프라이빗이 앉아있던 악마의 멱살을 붙잡았다.
“너, 우리 대장님께 무슨 헛소리야?”
“말 그대로예요. 난 오래전부터 스키퍼랑 결혼하기로 약속했으니까.”
“뭐?”
둘은 서로의 멱살을 붙잡고 카펫 위를 굴렀지만 스키퍼는 귀여운 다툼을 보는 듯 허허 웃어주기만 했다. 자신만큼 매운 주먹을 맞는 일보다, 프라이빗에겐 그 눈치 없는 웃음이 더 야속했다. 그래도 손과 발을 구르는 걸 그만둘 수 없었다. 악마에게서 대장님을 지켜내야 했으므로!
이튿날 악마 녀석은 한 손에 근사한 꽃다발을 들고, 나이에 어울리지 않게도 꽤나 값이 나가 보이는 반지 상자를 쥔 채 나타났다. 프라이빗은 제법 젊은 나이에 자신이 고혈압으로 멀리 가버릴 수도 있다는 것을 예감했다. 그는 앳된 얼굴로 자신의 뒷목을 짚었다. 하지만 스키퍼는 단정하게 차려입은 그 깜찍함에 사랑스러움이 가득 묻은 웃음을 터뜨렸다. 그의 눈에 어린 알동이는 한없이 아담하고, 귀엽고, 앙증맞았다. 꽃다발을 스윽 내미는 모습은 예전 그의 머리에 꽃 한 송이를 꽂아주었던 때를 생각나게 해, 미소가 사라질 수 없었다.
스키퍼는 새빨간 장미꽃이 가득 담긴 다발을 품에 안았다. 프라이빗의 눈이 크게 뜨여졌다. 장미꽃 사이로 퍼지는 스키퍼의 웃음에 알동이의 뺨은 꽃보다 붉게 변했다. 그는 반짝거리는 반지보다 향긋한 꽃이 스키퍼에겐 더욱 마음에 들었나 보다고, 반지 상자를 주머니 속에 넣었다. 후에 스키퍼의 손을 맞잡고 끼어줄 때를 기대하는 그의 떨림이 상자를 따뜻하게 만드는 것 같았다.
점점 달콤한 향이 공기 중으로 피어나는 것 같은 둘을 보고 프라이빗의 눈이 애처롭게 흔들렸다. 그는 참다 못 해 대장에게서 커다란 장미꽃 다발을 뺏어들고 어색하게 웃었다.
“꽃이 참 예쁘네요. 그렇죠, 대장님?”
제가 화병에 꽂아둘게요! 물론 그중 제일 못난 한 송이만 골라내, 대장의 방도 아닌 식탁 위에 장식할 심보였다. 스키퍼는 좋은 생각이라고 고개를 끄덕였다. 꽃다발이 스키퍼의 품이 아닌 다른 곳으로 가버리자 어린 청년의 발그레하던 표정이 싸악 사라지고 얼굴에 그늘이 진다. 프라이빗은 그 어두운 악마의 기운을 놓치지 않고 물러서지도 않은 채, 질 수 없다는 인상으로 째려보았다. 그들은 누가 먼저라고 할 것도 없이 서로의 옷깃을 험하게 쥐었다. 장미 다발은 바닥으로 툭 떨어졌다. 그 잡아먹을 것 같은 표정과 손짓들을 바라본 대장이 깜짝 놀라 프라이빗을 말렸다.
모처럼 근사하게 입은 옷이 망가지잖나. 스키퍼는 알동이의 매무새가 흐트러지는 걸 안타까워했다. 그리고 그 얘기와 막아서는 손짓으로 프라이빗이 실망한 표정을 감추지 못 했다. 알동이 또한 스키퍼가 말하는 부분의 뭔가가 이상하다고 생각이 들었지만, 그것보다는 따뜻한 보호에 감동을 느꼈다. 그는 곧 스키퍼를 따라 소파에 앉았다. 대장의 오른쪽을 차지한 악마가 프라이빗을 보고 시익 웃는다. 막내는 아랫입술을 꼭 깨물었다. 그는 자신이 더 이상 우물쭈물 해선 그를 막을 수 없다고 다짐했다. 내일 당장 아끼는 루나콘 인형이라도 팔아 세상에서 가장 근사한 꽃다발을 대장 앞에 바치겠다고 생각하곤, 그는 쿠키와 우유를 준비하러 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