핥는다

프라스킵 26일 밤

판다멍 2016. 1. 1. 02:57


크리스마스가 지난 다음날은 캐럴도 더 들리지 않았다. 기지에는 달콤한 냄새보단 다시 냉기가 들어찼고 막내는 몇 잔 얻어 마신 에그녹으로 해야 할 일을 놓쳐버렸다. 익숙지 않은 알코올은 긴장했던 마음을 충분히 풀어주었지만 그의 시야와 머릿속까지 풀어버린 것이 문제였다. 그걸 프라이빗이 깨달았을 때에는 그가 보드라운 이불 속에서 발을 꼼지락 거리고 있을 때였다. 1년의 한 번 뿐인 기회를 잃은 프라이빗은 베개에 몇 번이고 얼굴을 박았다. 기다리던 날이 이런 식으로 흘러가있을 줄 모르고 마냥 단 꿈을 꾸었기에 원망은 시간을 향해야할지 에그녹을 탓해야할지, 그저 눈을 꼭 감았다. 그리고 꾸물대던 아침에 대장의 목소리를 들은 그는 다짐을 했다. 내년의 특별한 날을 포기하기로 하고 벌떡 일어난다. 조급해진 마음은 때가 중요한 게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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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장과 단둘이 정찰조가 된 프라이빗의 걸음이 유난히 사뿐거렸다. 날은 차고 안개가 가득했지만 그의 마음을 흐리게 만들진 못했다. 스키퍼의 옆에서 걸음을 맞추며 따라 걷는 것은 딱딱한 겨울 바닥도 곱게 느껴졌다. 스키퍼는 신이 난 막내와 눈이 마주치자 내려가 있던 입 끝을 올려주었다. 프라이빗의 볼이 간지러웠다. 그는 혹시나 전날 대장의 앞에서 엉성하게 준비한 말을 뱉어버리고 말았을까 겁이 났다. 그의 목에서 마른침이 굴러가 한번 울렁였다.

 

“제가 말실수라도 하지 않았나요…?”

“자네 말실수라……. 중간에 리코의 컵을 빼앗아 에그녹을 마신 실수는 있었지.”

 

그건 리코가 직접 만든 거였다고. 입김 속에서 스키퍼가 시익 웃었다. 더 독한 잔을 마셨단 것을 그때서야 막내는 깨닫고 혀를 빼물었다. 검은 장갑을 낀 대장의 손이 그 머리를 슥슥 쓰다듬는다. 프라이빗의 귀가 더욱 빨개졌다. 그는 머플러에 시린 코를 박고 몰래 웃었다. 주머니에 넣은 손끝을 말아 쥐자 작고 빠른 고동이 손에서도 느껴진다. 프라이빗이 다시 침을 삼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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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희 어제 본 멜로영화 말예요. 궁금한 게 있는데…. 식기가 부딪치는 소리가 오가는 중에 코왈스키가 입을 연다. 프라이빗은 이 저녁이 끝나고 전할 중요한 낱말들에 대해 되새기느라 바빴다. 막내의 입은 그 말이 소리 내는 모양으로 오물거리기도 했다. 행여나 입에서 샐까 음식과 함께 꿀꺽 넘긴다. 그렇게 몇 번을 연습할수록 프라이빗의 얼굴에선 씩씩함이 가득했다.

 

“첫사랑은 이루어지지 않으니까.”

 

막내는 심장이 멈추는 기분을 느꼈다. 동그란 눈으로 스키퍼를 바라본다. 그 입에서 나온 말이었다. 안 그런가, 코왈스키? 도리스가 자네에게 그렇잖아. 뒤에 이은말이 본인도 우스운 듯 스키퍼는 킥킥 거렸다. 그 웃음까지 받자 코왈스키의 얼굴이 보기 좋게 울상이 되었다. 그리고 프라이빗은 첫사랑과 눈이 마주쳤다. 서둘러 시선을 접시에 꽂고 얼어붙은 손으로 포크질을 한다. 프라이빗은 음식을 꼭꼭 씹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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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다리던 때가 왔다. 사실 프라이빗은 때를 기다리지 못할 것 같아 그저 마음을 다잡았다. 그게 프라이빗의 기회였다. 그는 대장의 방문을 조심스럽게 두드렸고 대장의 앞으로 가까이 다가가 떨리는 말들을 풀어놓았다. 그가 준비했던 말과 완벽히 똑같을 수가 없었다. 머리는 가슴이 뛰는 소리에 엉켜, 외웠던 단어를 혼동했고 그럭저럭 긴장한 입이 다물렸다. 프라이빗이 고개를 숙이고 입술을 깨물었다. 스키퍼는 그런 프라이빗과 다르게 저녁식사에서 했던 말과 완벽히 똑같은 말을 해냈다. 깨물린 입술이 아프다가, 손이 얼었다가, 무언가가 바닥으로 떨어졌다. 그게 너무 무거워 막내는 그 자리에서 움직일 수가 없었다. 프라이빗은 찬 코를 훌쩍였다. 스키퍼가 참 다정스럽게도 그의 어깨를 토닥인다.

 

“지나면 아무렇지 않아질 거야.”

“대장님에겐 아무렇지 않은 일이 되는 거군요.”

 

막내의 입에선 울음과 미움이 쏟아졌다. 대장의 말로 그가 지금 느끼는 전부여서 말을 해야 할 것 같았다. 그의 마음을 조금이라도 알아주고 받아주길 바랐다. 스키퍼는 시선을 내렸다. 그 말에 대답을 하지 않는다. 그는 막내가 크리스마스 밤에 웅얼거렸던 말을 알고 있었다. 대장님은 제 첫사랑이에요. 스키퍼는 오전에 그 얘기를 해줬어야 했다고 미안한 얼굴을 짓는다. 그리고 막내의 계획이 로맨틱하다며 그를 달랬다. 프라이빗은 스키퍼에게 못난 눈물을 보이고 싶지 않았다.

 

“크리스마스에 하려던 건 그런 이유가 아니었어요.”

 

대장님에게 지금 같은 말을 들어도, 크리스마스라면 행복할 텐데. 이제 나한테 남은 건 슬픈 12월 26일 밖엔 없어요. 오늘만 되면 이 순간이 기억나는 게 무서워서 어떡하죠. 프라이빗의 어깨가 들썩였다. 스키퍼가 그를 안아주었다. 특별했던 날 뒤에는 언제나 아무것도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