낙엽
감수성이 풍부한 부관은 가을이 되면 혼자 시를 읊곤 했다. 과학을 신봉하는 그에 맞지 않게도 그는 꽤 탁월한 시적 재능을 가진 사람이었다. 그리고 그것이 나름 어울리는 모습이라고 그의 대장은 생각하고 있었다. 그가 시를 지었을 때는 곧 그의 사랑이 그리워졌을 때였다. 애처롭게도 코왈스키는 그의 이루어지지 않는 마음을 곱씹으며 시 구절에 사랑하는 이름을 넣어 불렀다. 오, 도리스 도리스……. 줄어드는 말은 울먹거리는 소리가 되기 일쑤였다. 사랑을 고백하기 위해 사온 꽃다발은 시들어 그의 책상 위에서 바스라졌다. 꽃의 풀냄새만 아른거렸다.
엽록소가 빠진 잎사귀들이 발에 자주 채이기 시작했다. 부스슥 거리는 소리가 귀에 익숙해지려면 며칠을 더 밟아야 하는 가을의 시작이었다. 스키퍼는 구둣발로 낙엽이 떨어진 부분만을 짚어 밟으며 걸었다. 부루퉁한 표정이 꾹꾹 눌러 짓이기는 발짓에 잘 맞았다. 어제 부관이 틀었던 CD의 잘못된 장면이 아직 그의 눈에 선했다. 이미 죽어버린 몹쓸 잎들이 또다시 과학자의 감성을 자극했을 거라 투덜댄다. 시를 눈물로 글썽이는 장면에 당황하며 리모컨을 누르던 그 모습을 떠올리고 스키퍼는 시선을 떨어뜨렸다.
부시럭대며 가을 길을 걷는 대장을 멀찍이서 발견해낸 코왈스키가 성큼성큼 다가간다. 대장은 어쩐지 고개를 푹 숙이고, 얇은 코트 주머니에 손을 찔러 넣은 채 구두코로 낙엽을 차고 있었다. 무엇인가 그의 마음에 차지 않아 애꿎은 잎들을 괴롭히는 듯했다. 스키퍼는 다가와 곁에 선 그를 눈치 채고 고개를 들었다. 그 얼굴을 보는 부관은 방긋 웃는다. 잎사귀 하나가 대장의 코트 깃에 내려앉아있다. 그는 붉은 벽돌처럼 잘 물들은 낙엽을 집어 들었다. 동그래진 눈의 스키퍼에게 쥐어주며 멋쩍게 빙긋거렸다. 스키퍼는 그것을 받아 손끝으로 잡고 빙그르르 돌려본다. 부관의 뺨은 손에 쥐인 잎처럼 상기되어 있었다.
도리스를 위한 그 시 말이야, 멋지더군. 대장은 코왈스키의 방금 그 표정에 일부러 볼멘소리를 뱉었다. 부관은 바로 사색이 되어 어깨가 옴씰거린다. 커다란 손으로 얼굴을 감싸며 부끄러움에 앓는 소리를 내었다. 제발 잊어주세요.
“제가 몇 번이고 차이는 거 알고 계시면서.”
“그래, 그래. 자네가 원한다면야. 잊어주고 말고.”
대신 나를 위한 시는 어때? 장난스럽게 그가 코왈스키의 눈을 바라본다. 아무런 대답도 없이 마주 바라보는 부관의 눈빛이 무거웠다. 괜스레 긴장한 스키퍼의 주머니에서 아까의 낙엽이 부수어졌다. 코왈스키가 고개를 훽 돌린다. 손으로는 입을 감싸며 대장과 도무지 눈을 마주쳐주지 않았다. 스키퍼의 푸른 눈이 깜빡대다가 떨리기 시작했다.
“사랑하는 나의 스키퍼…….”
부관의 입에서 짤막한 목소리가 나왔다. 운을 떼던 입술이 다시 닫혔다. 그는 고개를 푹 숙였지만 큰 키 덕분에 그의 얼굴이 몹시도 붉어져 있다는 걸 대장은 알 수 있었다. 코왈스키를 따라 화끈거리는 볼을 한 스키퍼가 낙엽을 꾹꾹 밟으며 재빠른 걸음으로 다시 걷기 시작했다.놀란 코왈스키는 서둘러 그를 좇아 그의 얼굴을 힐끗 바라보았다. 그의 대장이 피식 입 꼬리를 올렸다. 그 미소에 마음이 놓인 부관은 간질거리는 기분으로 배시시 웃었다. 그가 옆에서 맞춰 걸으며 대장의 발에 감기는 낙엽소리를 듣는다. 그리고 길의 끝에서 대장은 낙엽 하나를 주워 그의 서랍 속에 두었다.